공포의 슬픔

장마를 네이버 뉴스로 접했다. 보스턴에는 장마가 없다. 장마가 있는 곳은 장마가 없는 곳에는 없는 정서가 있다. 장마와 함께 살아온 문화권이 향유하는 기억의 조각모음은, 태양이니 호르몬이나 비타민 합성 따위로 설명해버리기엔 깊은 어두움이 있다.

성인이 된 후 장마철은 불편하고 불쾌한 기간이었지만, 유년기의 장마철은 침대 밖은 위험하니 얌전히 집에서 책이나 읽는 기간이었다. 사각거리는 모시소재 이불을 둘둘감고, 물방울이 맺힌 수정과 한 잔을 마주하고 소파에 앉아서 경건하게 미스테리/호러 물들을 잔뜩 쌓아 놓고 읽었다. 지금은 어디가고 없는 도서 대여점을 탈탈 털고도 모자라 주말이면 부모님들을 이끌고 서점으로가 신간을 싹 쓸어왔다. 부모님은 장르를 불문하고 책 값 만큼은 흔쾌히 내어주시곤 했다. 집 책장에는 셜리, 브람스토커, 포우, 스티븐 킹의 책들이 쉿!, 공포특급 시리즈들과 격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곤 했다. 그 중에서도 쉿! 시리즈는 혁신적이었는데,  빨강/파랑 셀로판지가 한 쪽씩 부착된 적청 입체안경을 쓰고 보면 사진이 입체로 보이게끔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VR 광풍이 무색할 만큼 20년 전 그때에도 모든 매체가 3D 일색이었다. 심지어 공중파에서도 적청 입체안경을 통해 보면 입체로 보이는 영상물을 방영할 정도 였다.

사람은 두 개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 이 때 사람의 양쪽 눈은 각각 보는 공간이 다르다. 6cm 정도 되는
두 눈 사이의 거리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기고, 각각의 눈이 보낸 2차원의 상(像)이 뇌에서 합쳐져서 입체감과 원근감을 지각하는 것이다. 스테레오 음원이 모노 음원에는 없는 공간감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콧구멍은 그냥 두 개다. 콧구멍 두개가 공간감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하나가 막히면 다른 하나가 같은 기능을 한다.) 적청 입체 안경은 이 원리를 이용한다. 적청 입체 안경을 썼을 때에 빨간 렌즈는 빨간색을, 파란 렌즈는 파란색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이 원리로 빨간 셀로판 테이프로 가리면 답이 보이지 않는 단어장이 그 시절 불티나게 팔렸다.) 반면에 빨강과 파랑이 보색관계에 있기 때문에 빨간 렌즈로는 파란색을, 파란 렌즈로는 빨간색을 더 잘 볼 수가 있다. 이때 두 장의 그림을 파란색과 빨간색의 색농도를 잘 조절하여 겹쳐주면 두 눈의 이미지가 만나는 위치를 조절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사진 속 사물이 앞 또는 뒤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어느 일요일, 쉿! 3권이 서점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모님을 졸라 서점에 갔다. 나들이를 하는 김에 저녁까지 먹고 집에 들어오니 가뜩이나 짧은 장마철의 낮은 온데간데 없고 밤이 일찍 찾아왔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책은 읽고 싶은데 밤은 무서웠다. 집은 분명 안전한 곳인데,  책 속의 세계는 집에 있어도 안전하지가 않았다. 비도 온다. 복도가 보이는 방 유리창은 사람이 지날 때만다 검은 실루엣만 보여준다. 이웃은 안전한 사람들인데, 책에 반쯤 걸쳐진 내 의식에는 낯선 것들이다. 뇌리에 자리잡은 것은 공감각적 공포이다. 시각은 거들 뿐, 빗소리, 온도, 습도 그리고 어둠이 불러온 상상력이 버무려지면 도망칠 곳은 없다. 잠도 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공포는 익숙하고 안전한 곳이 낯설고 불안한 곳으로 느껴질 때 극대화된다. 희번뜩 “내가 엄마로 보이니!” 이 한마디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고딕소설의 대가부터 하이텔 공포작가 지망생까지 집, 병원, 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공포는 가족, 이웃, 애완동물이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사실 이 시절 내가 공포물에 빠지게 된 이유는 이웃에 살 던 동네 형의 영향이 컸다. 그 형은 집에 공포소설 및 미스터리 모음집을 잔뜩가지고 있었고 종종 내게도 빌려주었다. 쉿! 3권 출간 소식도 형에게 들었다. 어느 날 형네 집에 놀러가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날 멈춰세웠다.

“오늘은 형네 집에 가면 안 돼. ”

” 왜요?”

“…”

“그럼 내일은요?”

“그러니까 한동안 형네 집 가면 안 돼… 사실 형이 얼마전 하늘나라로 갔어. 네가 가서 형 찾으면 형 엄마가 많이 힘들어. 그러니까 집에 있자. 차 조심하고.”

형은 며칠 전 그리 늦지도 않았는데 어두운 장마철 어느날, 학원에 다녀오던 길에 빗길에 미끄러진 차에 치여 숨졌다고 했다. 그 시절 형의 호러/미스테리 물에 대한 애정은 주변사람 모두 익히 아는 바여서 형네 어머니는 뭔가 섬뜩한 느낌에 형이 심취해있던 책들마저 원망했다고 했다. 형의 죽음은 공포소설 속 죽음과는 다른  현실의 일이라서 무섭다기 보다는 잔뜩 슬펐다. 형이 그리워서 며칠 울었다. 형이 죽은 것도 몰랐다니 미안해서 좀 더 울었다.  나한테 뒤늦게 이야기 해준 엄마도 괜히 미웠다. 그러다 무심코 책장을 보았는데, 형이 빌려준 공포소설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미처 돌려주지 못해, 이제는 돌려줄 수 없는 책이 되었다. 형의 죽음은 무섭지 않았는데, 그 책은 뭔가 무서웠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 책 만큼은 달라져 있었다 – 죽은 형이 빌려준 책.  내게 한 번 그렇게 인식되고 나니 그 책이 꽂혀있는 책장은 바라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그 책을 버리자니 그럼 나는 죽은 형이 빌려준 책을 버린 아이가 되어 버리니 그것은 더 무서웠다. 하지만, 형은 참 좋은 형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자꾸 먹으려 애쓰고 애쓰니 천천히 시간은 흘러 그 책도, 추억이 되었다 – 좋은 형이 남겨주고 간 책. 그 책은 그렇게 몇 년을 우리 집 책장에 희미해진 기억으로 잘 머물다 생애 첫 이사를 가던 날,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과 함께 상자에 담겨 새마을문고 어딘가로 보내졌다.

돌이켜 보면 공포는 묘하게 슬픔과 닮았다. 무언가 물(水)의 정서가 있고. 우리가 자주 쓰지 않는 감정의 기저에서 부터 수직상승하는 느낌도 든다. 생각해보면 내 공포를 자극하던 존재들도 대부분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 몰락한 집안의 주인이라던가, 원치 않게 세상에 태어나 버림받은 괴물이라던가, 친구의 눈 먼 질투에 희생된 여고생들이라던가. 모두 원망, 한, 슬픔을 갖고 있었다. 슬픔은 내게도 낯설다. 가끔 슬퍼지려 하는 기분이 들면 무섭기도 하다..

장마를 네이버 뉴스로 접했다. 구글로 나를 무섭게 하던 쉿! 시리즈를 찾아본다. 공포소설을 좋아하던 소년의 교통사고는 뉴스에 없다. 나는 기억으로부터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모두 먼 곳에 있다.  장마철의 서울 하늘을 생각하면 기분이 참 눅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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