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 여동생이 집을 떠나서 혼자 살게 되면 자살할까 겁이나요.”
지금은 이름도 존재도 없다고 했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타국으로 병합된 나라에서 온 자매가 있다. V와 M은 자신들의 나라가 개정판 지도에서 사라질 무렵 미국으로 건너왔다. V와 V의 아들, 그리고 M은 한 집에서 살았다. 고맙게도 V와 M은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왕복 세 시간 거리의 Medford에서 부터 Hyde Park의 강의실까지 거의 늦는 법 없이 찾아왔다. 둘은 자매인데도 참 달랐다. V는 해장국으로는 우족탕이 최고이며, 담배도 몸이 원하면 가끔 펴 줘야 정신건강에 이롭다며 호탕하게 웃곤 했고, 어딘가 어두운 듯 수줍음이 많은 M은 미안할 일이 아닌데도 늘 습관처럼 “I’m sorry”로 말문을 떼곤 했다.
어느 날 부터인가 M은 V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기 시작했다. 워낙 다정한 자매였기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종종 영어가 좀더 능숙한 V가 M에게 러시아어로 M의 이해가 부족한 부분을 설명해주기도 하였기에 그들의 친밀한 관계가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둘은 말조차 섞지 않았다.
휴가를 떠난 누군가의 일을 대신하기위해 M이 수업에 빠진 수요일 오후, 강의실을 빠져 나가는 V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V는 M이 요새 부쩍 독립하고 싶어했고 이를 말리다가 다툼이 커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V는 그 해 대학입시를 앞둔 아들을 둔 엄마였고, M의 가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V와 M, 둘 다 50이 가까운 나이인걸 알기에, 나는 V에게 M이야 어른이고 일도 시작해 수입도 있으니 그녀가 정 그리 원하면 그렇게 하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V는 한숨을 쉬면 내게 말했다.
“저는 제 여동생이 집을 떠나서 혼자 살게 되면 자살할까 겁이나요.”
M이 종종 쓸쓸한 표정으로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던 모습이 생각났다. V에게 왜 M이 그럴까봐 걱정되냐고 재차 묻자. 망설임 끝에 V는 M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M의 남편은 군인이었다. 당의 신임을 얻어 수입도 좋고 진급의 기회도 탄탄한 재원이었다고 했다. M의 남편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했고, M은 그런 남편을 자랑스러워 했다. 둘 사이에는 열살바기 아들도 하나 있었다. 자신도 크면 아빠같은 군인이 되겠다고 그리고 엄마를 지켜주겠다며 아빠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던 사랑스런 아들이었다고 했다. 그러던 중에 소련이 와해되고, 짧은 독립의 시기를 거쳐 내전이 일어났다. M의 남편은 선택을 강요 받았다. 어느 선택에도 손에는 총이 쥐어지는 자리에 있었다. M은 그때 남편을 설득하여 몰락해가는 나라를 떠나지 못한 것을 아직도 후회한다고 했다. 남편은 곧 돌아올게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내전이 끝날 즈음에는 남편의 죽음에 책임을 질, 그 어떤 명분을 가진 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남편의 죽음을 책임질 국가 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He died for nothing.”
분노한 V가 깨문 아랫입술 사이로 두 번 이 말이 새어 나왔다. 여기까지 듣고나니 V가 이야기를 그만 멈췄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V가 영어를 이렇게 잘 했었나. 그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내가 들여다본 어둠 아래에서는 더 깊은 어둠이 나를 올려다 보고 있음을 직감했다.
남편을 잃은 M은 아들 하나 바라보며 살았다. 하지만 아들에게 아빠의 죽음은 세상이 산산조각나는 것과도 같았다. M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들을 데리고 V의 가족에게 의탁하는 것뿐이었다. M은 돈을 벌기 위해 억척스럽게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휴식은 상상력에게 시간을 내어주고, 망상과 고통을 불러들일 뿐이었다. 말로는 V에게 신세지기 싫었다고 했다. 가족들 간에는 종종 고마움과 자존심이 뒤섞인 바보같은 감정들이 들 때가있다. 아들의 미래도 마음의 짐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전쟁 후 파탄난 경제체제 안에서 돈벌이 기회는 많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일감을 찾아 밖을 떠돌다 집에 돌아온 M은 V에게, 그리고 아들에게 늘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고 했다. 남편을 설득해서 도망치지 못해서 미안하고, 남편은 군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을지 몰라도, 남편의 죽음은 생각도 못한채 자랑스럽게 손을 흔들던 자신이 부끄럽고 원망스러워서 미칠것 같다며 V의 품에 안겨 매일 울었다고 했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부엌 옆 작은 방에서 M의 아들이 돌아눕는 소리가 났다.
M은 아들을 볼 때마다 남편 생각이 나서 우는 표정이 되곤 했다. M의 아들은 좀처럼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다만 말 수가 부쩍 줄었다. M의 아들은 V의 아들과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V의 남편과는 유독 데면데면 했다. V의 남편은 아빠를 잃은 M의 아들을 자식처럼 아껴주었지만, 그럴 수록 M의 아들은 어깨를 빼며 더 어두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슬픔과는 별개로 시간은 매정하게 흐른다. M의 아들은 말 수가 더 없어졌지만, 학교도 다니고 집에도 꼬박꼬박 제 시간에 들어오고 괜찮아 보였다. 괜찮지 않은 사람이 괜찮아 보이고, 괜찮은 사람이 종종 괜찮지 않아 보이는 경우가 있다. M의 아들이 그랬다. 사실 줄곧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16세가 되던 여름, 아버지의 기일을 1주일 앞두고 M의 아들은 방에서 목을 맸다고 했다. M의 아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어떤 절망이 그 어린 영혼을 세상의 끝으로 내몰았을까. M은 그 답을 구하지 못한 채 한동안 반쯤 실성한 채로 살았다고 했다. V는 그때쯤 이민을 결심했다. 갑작스런 결심은 아니었다. 미국에는 먼저 자리잡고 살고 있는 배다른 여자형제가 있었다. V는 아들의 미래가 늘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무엇보다 M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서둘러 짐을 챙겼다. V의 남편은 남아서 돈을 벌다가 기회가 있으면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M은 캄캄한 어둠뿐인 창 밖만 보며 한 숨도 자지 않고 미국 땅에 도착했다.
V는 남편이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살림을 꾸려나갔다. 작지만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아파트도 얻었고, 아들도 공립학교에 나가기 시작했다. M도 대형 체인 레스토랑에 취직해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나가다가 매니저가 M을 찾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밤 낮으로 매일 일했다. M은 휴가도 여가도 모른 채 일만 했다. 큰 액수는 아니어도 쓰지 않고 벌기만 하니 제법 돈이 모였다. 몇 년이 지나자 M은 독립을 결심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V에게 밝혔다. V는 M에게 독립은 안 된다고 했지만, 왜 안 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M은 그 이유를 알았지만 V에게 왜 안 되냐고 재차 물었다.
M은 V에게 이제 제발 그만 미안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M은 모든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M은 언제나 미안하다고 했다. 수 많은 미결(未決)의 미안함 중에서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찾았다고 말했다. 언니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 V의 화목한 가정, 성공한 남편, 대학에 합격한 아들, M은 V의 모든 것을 마음 다해 축하를 해주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상실감이 엄습했으리라. V는 M의 마음을 헤아려 조심조심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V는 재차 자신은 그래도 M을 보내줄 수 없다고 했다. 가족을 잃은 것은 V도 마찬가지다. 제부와 조카를 차례로 잃었다. V도 자신을 자책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여동생마저 잃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V의 의지는 결연했다. V는 내게 말했다.
“It’s a sister thing. We need time.”
V에게 조언을 하거나, M의 슬픔을 가늠할 혹은 동정할 자격은 내게 없다. 그저 가슴이 미어지는 이야기에 할 말을 잃었을 뿐 이었다. M의 슬픔은 그녀의 것이다. V의 고집은 정당한 것이다. 나는 M의 슬픔을 들은 대가로 M을 마주할 때마다 M의 슬픔을 짐짓 모르는 듯 연기를 해야 했다. 둘의 어색한 사이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야 했다. V와 M, 둘의 줄다리기는 팽팽했다.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서로를 강렬하게 끌어 당겼다.
M은 오늘도 인사처럼 I’m sorry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매일 각자의 괜찮지 않은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It’s Okay. 괜찮아요. 말하며 살고 있다. 무기력한 나는 괜찮지가 않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추고 있는 것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바라건데 M이 늘 바라만 보던 어둠 안에서 빛을 보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