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있다.
이런 순간은 예고도, 인과도 없이 찾아온다. 대부분은 글쓰기에 집중하기 힘든 때에 찾아 온다. 해동된 오징어를 소금으로 북북 씻고 있을 때라던가,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에스컬레이터에 막 올랐을 때라던가, 단 한 개의 정지신호도 걸리지 않은- 어쩌면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는- 유독 구불구불한 출근길에 말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난데없이 불어닥친 눈 폭풍으로 오전 강의가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마침 그 순간이 찾아왔다. 눈 쌓인 정적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쓴다.
구식 커피머신이 제 할 일을 다하는 소리에 안심하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영감이 허망하게 날아가기 전에 붙잡아 두어야만 했다.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은 한 때 날려 보냈다 다시 내게 돌아온 전서구(傳書鳩) 같은 글들이다. 개중에는 분명 영영 나와 인연이 없어진 글들도 있을 것이다. 떠난 글은 잡을 수 없다. 어렴풋이 기억나서 끄적거려봐도 첫 상념들과는 이미 다른 허탕글인 것이다. 내게 돌아온 전서구는 보통 어깨죽지에 벼룩을 숨기고 있거나, 나이가 들어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금붙이를 물고 돌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