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달러 25센트짜리 2분

퇴근길은 출근길보다 막힌다. 출근길은 40분에서 45분. 퇴근길은 1시간에서 1시간 반정도 걸린다. 수백번을 왕복한 터라 길이야 훤히 알지만 네비를 켠다. Waze를 쓴다. 언젠가부터 네비는 교통량에 따른 우회로를 제안한다. 훌륭한 기능이다. 대부분 그 제안을 수락한다. 아주 가끔 내 의지로 제안을 거절했을 때, 네비의 도착예정시간 보다 빨리 도착하면 그 쾌감을 이루어 말할 수 없다. 대신 고집부리다 예정시간보다 늦으면 좌절한다. 인공지능의 승률이 월등히 높다. 삐약이 주제에 이세돌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여느 때처럼 i93N. 북쪽으로 난 고속도로를 탄다. 한 번 고속도로를 타면 도심을 지날 때까지는 선택권이 없다. 하지만 도심을 지나면 선택의 여지가 많다. 보스턴 시청과 노스엔드가 있는 23번 출구로 나가서 시내로 가는 길이 있다. 아니면 계속 고속도로를 달려 26번, 27번, 28번 출구를 고를 수도 있다. 출구 밖 상황에 따라 네비는 다른 제안을 한다. 수시로 경로를 재탐색한다. 경로를 재탐색하면 예상도착시간이 줄어들거나 늘어난다.

네비 기능설정에서 유료도로를 포함하면 비용에 관계없이 최단시간 경로를 제안한다. 연말이라 도시에는 차가 많다. 26번, 28번은 무료도로다. 27번 Tobin Bridge로 우회하면 1달러 25센트를 내야한다. 오늘 네비는 경로를 재탐색하여 나에게 27번으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28번 출구보다 27번 출구의 예상도착시간이 2분 빨랐다. 얼핏 보기에도 28번 출구는 차가 빽빽하게 줄지어 있었다.

나는 고민했다. 2분의 시간과 1달러 25센트. 한시간으로 계산하면 37달러 50센트. 내가 버는 시급보다 많았다. 노동하지 않는 동안 내 시간은 얼마일까. 내 2분의 기회비용은 얼마일까. 내가 27번 출구를 택함으로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1달러 25센트를 지불함으로서 나의 하퇴삼두근과 아킬레스건은 2분만큼 노동을 덜한다. 나의 시신경, 긴장된 승모, 긴장된 승모로 인한 불균형한 근육발달, 그로 인한 스트레스, 교통체증으로 인한 스트레스. 스트레스로 인한 스트레스. 스트레스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한 스트레스.

주차장에 도착해서 시동을 켜 둔 채로 쳇 베이커의 Alone Together의 마지막 2분을 들었다. 재즈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요새는 하루종일 쳇 베이커를 듣는다. 아무 곡이나 들어도 멜로디가 좋길래 그냥 듣는다. 재즈는 정말 모르겠다. 재즈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은 참 재주도 좋다. 나는 재즈와도 도시와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어제의 나는 28번 출구를 택했다. 오늘의 나는 27번 출구를 택했다. 앞으로 같은 상황에서 나는 쳇 하고 27번 출구로 갈 것이다. 그리고 1달러 25센트 짜리 2분을 맛지게 소비할 예정이다. 가급적이면 매번 다른 방식으로.

Chet Baker – Alone Together

https://youtu.be/zdDhinO58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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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문득 서태지를 듣고 싶은 아침이었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걸었는데 “서태지!” 하고 누가 귀에다 외친 것처럼. 벅스로 서태지 전곡 싹 긁어서 틀어놓고 며칠 출퇴근을 했다.

1992년 봄, 아버지가 퇴근하시면서 카세트 테잎 하나를 내게 휙 건네셨다. “고놈 음악 요망지다. 뜰 것 같아.” 이제는 내일 모레 70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는 음악 일을 하시는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탁월한 안목을 가지고 계셨다. 90년대에 음악기획사도 잠시 하다 접으셨는데. 아쉽다. 그 안목. 아버지는 지금도 취미가 뮤직비디오 감상이다. 몇 년에 한 번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가 컴퓨터 앞에 앉아 아이돌 뮤직비디오를 미간 주름으로 보고 계시는 모습을 맞닥뜨리게 된다.

아무튼,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는 특종 TV 연예 첫 회에 이루어졌는데. ‘신곡 무대’ 라고 신인가수의 곡을 작곡가, 작사가, 그리고 선배가수가 들어보고 신인가수에게 평점과 함께 조언을 해주는 코너였다. 지금도 레전드 영상으로 남아 있는데, 서태지는 7.8의 평점과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리고 나서 비웃기라도 하듯 각종 지상파 음악프로들에서 17주 연속 1위를 해버린다.

지금의 서태지를 만든 곡은 ‘난 알아요’이지만 나는 1집 앨범을 고루 좋아했다. 특히 ‘이제는’ 이라는 곡을 좋아했었는데. 지금 들으면 촌스럽다. 하지만 2008년 ETP Festival에서 15년 만에 ‘이제는’의 Remake 버전을 발표하는데, 최근에 '응답하라 1994' 수록곡으로 유명해진 ‘너에게’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오글거리는 나레이션만 넘기면 어렸을 때 좋아했던 곡을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즐겨 들을 수 있게 되어 고맙다.

내 고마움과는 별개로 20세기의 서태지는 21세기에 들어 숱한 삶의 고난과 마주하는데, 인터넷의발달로 밝혀진 서태지의 초기 곡들에 대한 표절 논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이혼(결혼 소식 전에 이혼 소식을 먼저 들음 )과 재혼(결혼-이혼-재혼 소식을 동시에 들음)으로 그의 신비주의를 겸한 잠적은 극에 달한다.

그 후에 발매된 2014년 Quiet Night 앨범을 들어보았다. 그나마 최신 앨범이라 생각만큼 많이 들어보지 않아 몇 곡들은 새로웠다. 원래도 서태지가 미디를 많이 쌓아 올려 곡을 만드는데, 여전히 고가의 미디 장비들로 만든 곡들이라 Flac 파일도 아닌데 웬만한 뮤직플레이어들로는 감당을 못하는 느낌. 키덜트 서태지가 자택에 틀어박혀 애니메이션 보고, 게임 하고, 미드 보고, 아직도 세계 7대 미스터리를 궁금해하고, 할로윈과 크리스마스에 설레하는 등의 자신이 즐기는 것을 앨범에 마구 담은 느낌.

나는 음악가와 음악을 동일시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타이틀곡 소격동을 부르는 서태지는 내가 좋아하는 서태지다. 서태지가 유년시절을 보낸 소격동은 5공시절 기무사 자리로 민간 사찰 및 청년들의 강제징집이 이루어진 곳이다. 늘 사회비판적인 음악을 발표하는 그가 건재를 과시하듯 자신의 장난감처럼 만든 앨범 가운데에 진지하고 꽉 찬 한 방을 준비해 두어 고맙다.

오늘은 하루종일 서태지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