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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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가 생겼다. 노화가 찾아왔다. 찾아왔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노화는 항상 진행중에 있었으므로. 나 스스로 변화를 관찰할 지표가 하나 더 생겼을 뿐이다라고 애써 의연하려 하는 중이다.

“The Age of Adaline” 라는 영화를 보았다. IMDB 평점 7.2 에 Rotten Tomato 지수54%. 수치상으로는 무난한 영화라는 뜻이다. 할리우드 서사공식을 따르고 대중에게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영합했다는. 이디스 워튼의 “The Age of Innocence”를 변주하여 중의적으로 지은 영어제목은 애덜라인의 시대, 혹은 애덜라인의 나이로 해석될 수 있겠다. 국내개봉 제목은 줄거리를 그대로 담은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 네이버 평점은 7.7. Blake Lively가 주연을 맡았다. 정제된 톤과 고풍스러운 의상. 그녀의 대표작인 미드 “Gossip Girl” 보다 훨씬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다.

Aging에 대한 다른 시각으로의 고찰은 젊은 육체가 숭상받는 할리우드에서도 그렇게 새로운 주제는 아니다. 피츠제럴드의 단편을 원작으로하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이라던가 니페니거 원작의 “The Time Traveler’s Wife”등의 영화에서 이미 다룬 바가 있었다. 완성도도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The Age of Adaline”의 Adaline은 벼락을 동반한 교통사고로 생체시계가 멈춰 젊은 모습 그대로 영생을 살아가는 축복(?)을 누린다. 모두가 갈망하는 영원한 젊음이 저주가 되는 지점은 Adaline이 키우는 강아지들이 몇 대를 거쳐 노화로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고, 결정적으로는 수 십 년 째 30대의 외모를 자랑하는Adaline과 이제 70을 바라보는 그녀의 딸이 식사를 하다가, 딸이 스스로 몸을 돌보는데 힘에 부쳐 이제 양로원에 들어가고 싶다고 Adaline에게 고백하는 장면에서이다. Adaline은 자신이 가진 불노(불사는 아니다)의 비밀을 쫓는 FBI를 피해 일정 기간마다 흔적을 지우고 이름을 바꾸면서 새 삶을 만들어간다. 그녀가 틈틈히 텅빈 창문을 응시하며 내쉬는 한숨은, 영원히 젊지만 정체성은 희석되고, 사랑은 유통기한이 짧고, 영혼은 외롭게 부유하는 무한한 삶의  궁극적 무의미를 보여준다.. 결국 그녀는 우연한 기회로 다시 생체시계의 멈춤 버튼을 해제하는 데 성공한다. 새로운 사랑과 파티장에 가려고 분주히 준비하는 저녁, 거울을 보다 굳은 듯 멈춰선다. 흰머리.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머리에서 흰머리를 발견하며 미소짓는다.  Adaline의 영원한 젊음은 모두가 바라는 Anti-Aging에 대한 역설이다. 그녀는 기쁘게 well-dying의 세계로 재 진입한 자신의 육체를 받아들인다.

지난 달 미국의 패션 잡지 Allure는 Anti-Aging이라는 단어를 자사의 매체에서 금지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은 Aging은 반드시 반(反)해야하는 것인가에 대한 재고에서 시작되었다. 여성들을 지나치게 대상화하는 사회에서, 그동안 주름이라던가 기미나 검버섯은 싸워 없애야할 노화의 적이었으며, 보톡스와 필러가 anti-aging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그렇다면 이제 주름제거와 미백등 노화방지 기능이 추가된 화장품을 어떻게 부르는가하면 브랜드 별로 Pro-Age (Dove), Age-Defying (Olay), Age Perfect (L’Oreal) and Slow Age (Vichy) 등으로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인 의미를 담고자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

Aging이라는 용어가 덕을 보는 분야도 있다. 고가의 주류와 숙성 소고기 시장이다. 와인과 위스키는 오크통 안에서, 소고기는 때로는 wet 하게도 아니면 dry하게도 Aging하며 몸값을 불린다. 지금은 부상으로 은퇴를 목전에 두고 있지만 스페인과 이탈리아 리그를 거쳐 프랑스 리그까지 평정한 후, 최전방 공격수로는 은퇴시기를 한참 지난 37세의 나이에 EPL 데뷔를 앞두고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스스로를 와인에 비유하며 말했다. “자신은 와인과 같아서 나이가 더 들 수록 더 강력해진다” 라고. 그리고 자신의 호언장담을 실력으로 증명해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시간의 풍파를 담은 얼굴의 점과 선들이 훈장인지 아니면 싸워 이겨 없애할 대상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젊은 시절 당대를 호령하던 한 러시아 여배우는 70대가 되어 자신을 찍는 사진작가에게 절대 포토샵을 하지 말고 원본 그대로 사진을 실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 가득한 주름 그대로 미소를 띈 채 사진작가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제 주름을 지우지 말아주세요. 이 사랑스러운 것들을 얻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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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찌와 시간


지난 주에 쓰려던 글인데 생각에 발목이 잡혀 늦어졌다. 원래 모찌에 대한 글인데 시간에 대한 글이 될 것같다. 요즘 내 글은 마침표 찍을 때까지 어디로 흐를지 모른다.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다 보니 시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시간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시간의 흐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시간의 흐름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흐름에 대한 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결론이 예상된다.

모찌는 곧 이웃이 될. 선아&재형 부부의 강아지이다. 간난강아지 시절부터 만나와서 모찌의 삶에 내 지분도 상당하다. 내 시간이 흐를 때 모찌의 시간도 흐른다. 모찌의 시간은 간다. 그녀의 심장박동만큼 빠르게. 개들의 평균 심장박동수는 160bpm, 강아지 시절에는 200-220bpm이다가 성견이 되면, 대형견은 140bpm, 소형견은 180bpm, 참고로 인간의 심장박동이 70-100bpm. 그러니까 강아지의 일생은 갓 태어나서는 Metalica의 The Four Horsemen에 맞춰 심장이 뛰다가 서서히 Beyonce의 Irreplaceable에 맞춰 사는 건데. 인간이 거의 평생 Don’t Worry, Be Happy 에 맞춰 사는 것에 비하면 꽤 빠른 템포라 할 수 있다. 선아 누나네 강아지 모찌는 아침이 되면 잠이 덜 깬 사람들의 발가락을 핥아 다니며 격한 아침 인사를 건넨다. 강아지의 기대수명은 인간의 1/6, 즉, 인간의 하루는 얼추 강아지의 일주일. 모찌는 시간을 어떻게 볼까.

모찌 시간 걱정할게 아니라 요새 나는 시간을 어떻게 보고 있나 생각해보니, 부쩍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왜 나이가 들 수록 빨리 흐르는 듯 느껴질까. 첫 째, 시간은 절대적이지만 상대적이다. 한 해 한 해가 일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감소한다. 10살 일 때는 1년이 인생의 10%, 20살이되면 5% 30이 넘어가면 3% 대로 떨어진다. 어느덧, 1년은 삶 전체로 보면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다.  둘째,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을 덜 챙겨보고 덜 기다린다. 소풍, 놀이공원, 크리스마스, 터미네이터2 개봉, 디아블로 발매. 야자는 언제 끝나나, 고3은 언제 끝나나, 후름라이드 앞 줄은 왜 이렇게 긴가. 다음 주 만화점프는 언제 나오나 드래곤볼은 언제 완결되나. 지금은 이런 기다림이 없다. 기다림이 줄면 시간은 그다지 더디게 느껴지지 않는다. 셋 째, 이정표 삼아 시간을 가늠할 만한 큰 일들이 나이가 들수록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삶이 시큰둥해지는 만큼, 시큰거리는 일들도 시끌거리는 일들도 많지 않다. 입학, 학교 앞 뽑기, 달고나, 서태지 1집, 첫 자전거, 첫 급식, 교통사고, 청소년 노래방, 변성기, 졸업, 입학, 반항, 졸업, 입학, 독립, 졸업, 입대, 결혼. 이정표의 간극이 점점 멀어진다. 내 다음 이정표는 무엇이 될까.

이 정도로는 훌쩍 지나버린 시간에 대한 억울함이 풀리지가 않아 Google신께 왜 나이가 들 수록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답을 점지하니. 논문 몇 개 던져 주신다. 대부분 인지심리 및 행동심리 관련해서 Impact Factor가 0.5를 웃도는 낮은 티어 저널들이었는데. 맛들어진 글들을 보니 왠지 저자들이 즐겁게 조사했을 것 같아서 부러웠다. 학자들이 설문을 통해 밝혀낸 결과에 의하면 사실 나이는 큰 변인이 아니고, 결정적인 요소는 *Time Pressure 라는 개념인데. 시간에 의한 압박의 강도가 클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사람들이 대답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면서 봐온 각종 시험들; 중간고사, 기말고사, 수능, TOEIC, TOEFL, GRE. 한 두 시간 시험 중에 느낀 시간의 속도감은 일상의 한 두 시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도 시간의 압박 속에서 데드라인이 정해진 프로젝트나 보고서 마감, 납기가 있는 일들을 할 때, 하루는 또 일주일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생각해보면. 그래. 나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스트레스, 스트레스, 머리 속을 맴도는 끝마치지 못한 일들의 망령들이 시간을 좀 먹고 있었다!

일년 째 차에 걸려있는 아델 씨디를 들었다. 4번 트랙, When We Were Young. 절절한 목소리에. 겨울비까지 오는데. 4분 여 시간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돌아갈 수도 없는 시간에 발이 걸려 자꾸만 넘어진다. 점점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천천히 젊음으로 매번 돌아가게 해주는 묘약은 기억이다. 이정표들을 따라 되돌아간 기억 속에 나는 아직도 20대 초반 언저리에 머물러있었다.

선아&재형네 집에서 코스트코에서 사온 짜장에 전날 굽고 남은 목살들을 함께 볶고, 군만두와 함께 먹고 있으니 모찌가 노려본다. 일단 한 그릇 비우고, 모찌를 안아 소파로 간다. 야들야들한 배를 맡기는 모찌. 모찌에게 정신을 쏟는 그 몇 십 분이, 집 안으로 성큼 여문 정오의 햇살과 달달하게 흐른다. 모찌는 장수할거다. 모찌가 등을 내민다. 식탐도 없고 운동도 좋아하고 어딜 가도 사랑 받으니. 이제 생후 14개월. 하지만 몸은 이미 다 컸다. 지금 모습 그대로 15년을 함께 하겠지. 겉모습은 멈춘 듯 그대로, 그래도 모찌의 시간은 숨가쁘게 흐른다. 눈 깜빡 할 사이에 그녀의 하루는 간다. 우리가 커피 한 잔 하는 사이에 모찌의 반나절이 사라진다. 우리가 하루를 보내고 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녀의 일주일이 지나있다. 모찌가 긴 하품을 한다. 모찌는, 계산이 없는 모찌는, 사랑을 주고만 가기에도 부족한 삶이라는 것을 안다. 아침에 눈 뜨면 혀를 휘날리며 내게 달려온다. 한껏 앞 발을 뻗어도 겨우 내 정강이까지지만, 밤 사이 그녀의 그리움이 한 뼘 자라 있는 것을 본다. 고맙게도, 매일매일 숨가쁘게 달리는 사랑을 본다. 그 작은 앞 발로. 멈춰 있는 내 등을 떠민다.

그래. 시간의 흐름 따위, 개나 주라지.

*Janssen, S.M.J., M. Naka, and W.J. Friedman. 2013. Why does life appear to speed up as people get older? Time & Society 22(2): 274-290.

공포의 슬픔

장마를 네이버 뉴스로 접했다. 보스턴에는 장마가 없다. 장마가 있는 곳은 장마가 없는 곳에는 없는 정서가 있다. 장마와 함께 살아온 문화권이 향유하는 기억의 조각모음은, 태양이니 호르몬이나 비타민 합성 따위로 설명해버리기엔 깊은 어두움이 있다.

성인이 된 후 장마철은 불편하고 불쾌한 기간이었지만, 유년기의 장마철은 침대 밖은 위험하니 얌전히 집에서 책이나 읽는 기간이었다. 사각거리는 모시소재 이불을 둘둘감고, 물방울이 맺힌 수정과 한 잔을 마주하고 소파에 앉아서 경건하게 미스테리/호러 물들을 잔뜩 쌓아 놓고 읽었다. 지금은 어디가고 없는 도서 대여점을 탈탈 털고도 모자라 주말이면 부모님들을 이끌고 서점으로가 신간을 싹 쓸어왔다. 부모님은 장르를 불문하고 책 값 만큼은 흔쾌히 내어주시곤 했다. 집 책장에는 셜리, 브람스토커, 포우, 스티븐 킹의 책들이 쉿!, 공포특급 시리즈들과 격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곤 했다. 그 중에서도 쉿! 시리즈는 혁신적이었는데,  빨강/파랑 셀로판지가 한 쪽씩 부착된 적청 입체안경을 쓰고 보면 사진이 입체로 보이게끔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VR 광풍이 무색할 만큼 20년 전 그때에도 모든 매체가 3D 일색이었다. 심지어 공중파에서도 적청 입체안경을 통해 보면 입체로 보이는 영상물을 방영할 정도 였다.

사람은 두 개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 이 때 사람의 양쪽 눈은 각각 보는 공간이 다르다. 6cm 정도 되는
두 눈 사이의 거리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기고, 각각의 눈이 보낸 2차원의 상(像)이 뇌에서 합쳐져서 입체감과 원근감을 지각하는 것이다. 스테레오 음원이 모노 음원에는 없는 공간감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콧구멍은 그냥 두 개다. 콧구멍 두개가 공간감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하나가 막히면 다른 하나가 같은 기능을 한다.) 적청 입체 안경은 이 원리를 이용한다. 적청 입체 안경을 썼을 때에 빨간 렌즈는 빨간색을, 파란 렌즈는 파란색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이 원리로 빨간 셀로판 테이프로 가리면 답이 보이지 않는 단어장이 그 시절 불티나게 팔렸다.) 반면에 빨강과 파랑이 보색관계에 있기 때문에 빨간 렌즈로는 파란색을, 파란 렌즈로는 빨간색을 더 잘 볼 수가 있다. 이때 두 장의 그림을 파란색과 빨간색의 색농도를 잘 조절하여 겹쳐주면 두 눈의 이미지가 만나는 위치를 조절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사진 속 사물이 앞 또는 뒤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어느 일요일, 쉿! 3권이 서점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모님을 졸라 서점에 갔다. 나들이를 하는 김에 저녁까지 먹고 집에 들어오니 가뜩이나 짧은 장마철의 낮은 온데간데 없고 밤이 일찍 찾아왔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책은 읽고 싶은데 밤은 무서웠다. 집은 분명 안전한 곳인데,  책 속의 세계는 집에 있어도 안전하지가 않았다. 비도 온다. 복도가 보이는 방 유리창은 사람이 지날 때만다 검은 실루엣만 보여준다. 이웃은 안전한 사람들인데, 책에 반쯤 걸쳐진 내 의식에는 낯선 것들이다. 뇌리에 자리잡은 것은 공감각적 공포이다. 시각은 거들 뿐, 빗소리, 온도, 습도 그리고 어둠이 불러온 상상력이 버무려지면 도망칠 곳은 없다. 잠도 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공포는 익숙하고 안전한 곳이 낯설고 불안한 곳으로 느껴질 때 극대화된다. 희번뜩 “내가 엄마로 보이니!” 이 한마디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고딕소설의 대가부터 하이텔 공포작가 지망생까지 집, 병원, 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공포는 가족, 이웃, 애완동물이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사실 이 시절 내가 공포물에 빠지게 된 이유는 이웃에 살 던 동네 형의 영향이 컸다. 그 형은 집에 공포소설 및 미스터리 모음집을 잔뜩가지고 있었고 종종 내게도 빌려주었다. 쉿! 3권 출간 소식도 형에게 들었다. 어느 날 형네 집에 놀러가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날 멈춰세웠다.

“오늘은 형네 집에 가면 안 돼. ”

” 왜요?”

“…”

“그럼 내일은요?”

“그러니까 한동안 형네 집 가면 안 돼… 사실 형이 얼마전 하늘나라로 갔어. 네가 가서 형 찾으면 형 엄마가 많이 힘들어. 그러니까 집에 있자. 차 조심하고.”

형은 며칠 전 그리 늦지도 않았는데 어두운 장마철 어느날, 학원에 다녀오던 길에 빗길에 미끄러진 차에 치여 숨졌다고 했다. 그 시절 형의 호러/미스테리 물에 대한 애정은 주변사람 모두 익히 아는 바여서 형네 어머니는 뭔가 섬뜩한 느낌에 형이 심취해있던 책들마저 원망했다고 했다. 형의 죽음은 공포소설 속 죽음과는 다른  현실의 일이라서 무섭다기 보다는 잔뜩 슬펐다. 형이 그리워서 며칠 울었다. 형이 죽은 것도 몰랐다니 미안해서 좀 더 울었다.  나한테 뒤늦게 이야기 해준 엄마도 괜히 미웠다. 그러다 무심코 책장을 보았는데, 형이 빌려준 공포소설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미처 돌려주지 못해, 이제는 돌려줄 수 없는 책이 되었다. 형의 죽음은 무섭지 않았는데, 그 책은 뭔가 무서웠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 책 만큼은 달라져 있었다 – 죽은 형이 빌려준 책.  내게 한 번 그렇게 인식되고 나니 그 책이 꽂혀있는 책장은 바라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그 책을 버리자니 그럼 나는 죽은 형이 빌려준 책을 버린 아이가 되어 버리니 그것은 더 무서웠다. 하지만, 형은 참 좋은 형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자꾸 먹으려 애쓰고 애쓰니 천천히 시간은 흘러 그 책도, 추억이 되었다 – 좋은 형이 남겨주고 간 책. 그 책은 그렇게 몇 년을 우리 집 책장에 희미해진 기억으로 잘 머물다 생애 첫 이사를 가던 날,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과 함께 상자에 담겨 새마을문고 어딘가로 보내졌다.

돌이켜 보면 공포는 묘하게 슬픔과 닮았다. 무언가 물(水)의 정서가 있고. 우리가 자주 쓰지 않는 감정의 기저에서 부터 수직상승하는 느낌도 든다. 생각해보면 내 공포를 자극하던 존재들도 대부분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 몰락한 집안의 주인이라던가, 원치 않게 세상에 태어나 버림받은 괴물이라던가, 친구의 눈 먼 질투에 희생된 여고생들이라던가. 모두 원망, 한, 슬픔을 갖고 있었다. 슬픔은 내게도 낯설다. 가끔 슬퍼지려 하는 기분이 들면 무섭기도 하다..

장마를 네이버 뉴스로 접했다. 구글로 나를 무섭게 하던 쉿! 시리즈를 찾아본다. 공포소설을 좋아하던 소년의 교통사고는 뉴스에 없다. 나는 기억으로부터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모두 먼 곳에 있다.  장마철의 서울 하늘을 생각하면 기분이 참 눅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