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이 너무 많다.

악인이 너무 많다. 악인 소식지가 된 미디어를 매일 본다. 잠발라야에 들어간 익힌 소시지를 하나 베어 물면서 생각한다. 악인의 가장 추악한 면 중 하나는 무지의 활용인데, 다음의 화법을 돌려가며 쓴다. “그건 몰라도 돼.” “모르면 가만히 있어” “몰랐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모르게 하려 하고 모른다고 하고 모르려고 한다. 많은 악인들이 꿰찬 자리들은 무지로 죄를 모면하기에는 너무 책임이 큰 자리라서, 무지도. 악이다. 아니, 무지야말로 최악이다. 무지하다면 그 자리에 있지 말았어야지. 공감의 결여는 더 최악이다. 무감각하다면 그 자리에 있지 말았어야지. 악인이 너무 많다. 고국에도 잠발라야를 입에 털어 넣고 있는 이곳에도.

레스토랑 주방에서 샐러드를 만드는 일은 하는 R이 자신이 요새 레스토랑에서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고민을 털어 놓았다. 그녀는 내게 자신이 잘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R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재차 이야기 해준다. 악인이 너무 많다.

  1. 월요일, 수요일은 오후 9시반까지가 정해진 근무시간인데 종종 손님이 없이 한가한 날은 9시만 되어도 집에 가라고 일찍 보내는 경우. 게다가 일찍 보낸 30분에 해당하는 임금은 지급하지 않았다.
  2. 목요일 오후 10시까지가 정해진 근무시간인데 손님이 많아 바쁜 날은 11시까지 근무하게 하고는 시급의 50%에 해당하는 법정초과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경우. 사장은 R에게 일찍 집으로 보낸 날과 시간을 맞바꾼 셈 치란다.
  3. 눈 폭풍이 몰아쳤던 지난 토요일, 근무시간에 식당에 도착하니 다시 집에 가라고 했다고 한다. 오늘은 출근하지 말라고 음성 메시지 남겼는데 몰랐느냐면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폭설로 손님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사장과 매니저와 매니저 딸이 일을 하고 있었다. 가게는 닫지 않았는데 왜 출근하지 말라는 걸까. 이렇게 저렇게 일할 시간이 줄면 나갈 돈은 일정한데 들어오는 돈이 준다. 곤란하다.
  4. R의 설명에 의하면 매니저는 감정의 기복이 심해 오후 5시에 나긋나긋하다가도 오후 7시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짜증을 부리는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했다. 사장은 매니저에게 인사관리부터 매장 운영까지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는데, 매니저는 이른바 비선실세였다. 매니저의 딸이랑 다툼이 있었던 웨이트리스가 뺨까지 맞고 직장을 그만둔 적도 있었다고 했다. 매니저 눈 밖에 난 직원 여럿이 이미 그만 두었다고 했다. 심성이 온화하고 겁이 많은 R은 항상 매니저만 만나면 벌써 심장이 벌렁벌렁해서 가급적 피해 다닌 다고 했다.

“Equality means dignity. And dignity demands a job and a paycheck that lasts through the week” – Martin Luther King Jr.

미국의 노동법은 고용주로 하여금 연방법과 주정부법을 동시에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연방법에 의거한 최저임금은 시간당 $7.25, 메사추세츠주의 최저 임금은 $11 (2017년 1월 1일부터 적용). 따라서 보스턴의 고용주들은 시간당 $11 달러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 이 밖에도 근무시간 변동과 보상에 대한 세부조항은 정부와 주 간에 차이가 있다. 따라서 고용주들은 피고용인들에게 그들의 업무와 더불어, 권리에 대하여 설명할 의무가 있다. (일정규모 이상의 사업장은 고용내규 핸드북을 제공한다.) R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함께 해결하려면 일단 그 핸드북을 함께 살펴 볼 필요가 있었다.

삶이 내게 내민 지혜 하나는, 문제 해결에 어줍잖은 지식을 뽐내기 이전에 해결에 도움이 될 전문가를 찾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도서관에는 나와 함께 파견 나온 사회복지사 M이 있다. 라즈베리 초콜릿 케잌을 기가 막히게 굽는 M은 대기업 인사과에서 오래 일하다 작년에 은퇴하고 우리 팀에 합류했다. M에게 R을 데려갔다. R은 M을 만나러 가는 길에 나를 붙잡고 신신당부한다. 매니저한테 자기가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했다는 사실이 들어가면 자기는 직장을 잃을 거라고. 그러면 큰일이라며. 직장에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아달라고. 일단 M에게 우리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물어본 후에 어떤 조치를 취할 테니 걱정 말라고 R을 안심시켜본다.

M을 만나 R은 서툰 영어로 다시 그 간의 일들을 설명했다. 그러다 감정에 복 받쳤는지 아니면 어쩌면 억울해서 또는 불안해서인지 이내 R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M은 따뜻한 말투로, 하지만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위에 나열한 R의 문제들은 영세 사업장에서는 관행처럼 이루어지는 일이며, 시간제 레스토랑 노동자. 조합도 없는 비정규직 개인의 권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부당함에 대한 증명과 보상을 위해 긴 시간 싸워야 할 수도 있고. 싸움 뒤에는 상처뿐인 영광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나와 M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싸우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R, 네가 틀린 것은 아니라고. 틀린 것은 그들이며 네가 권리를 찾고자 그들과 맞선다면 너와 함께 하겠노라고. 그렇게 호기롭게 R에게 이야기 했지만, 현실적인 고민에 대한 우리의 현실적인 해결책은 사실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아아, 악인과 싸우기 위해 죄 없이 성실한 사람들이 감수 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민 후 첫 직장을 구할 때는 힘들었다지만 이미 2년이나 일한 경력이 있는 R에게 이직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부당한 대우를 당하며 불안해하며 다닐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이 R에게는 와 닿지 않는 모양이다. 더 나은 직장이다 하더라도. 새 직장을 찾고, 교통수단을 알아보고, 새 사람과 일에 적응하는 일련의 불확실한 모험들이 R에게는 부당하지만 확실한 현실보다 더 두려워 보인다. 일단 ‘시험 삼아’ 라도 좋으니 한 번 보자고 R에게는 새 일자리를 알아봐주기로 하고 마음에 드는 새 직장이 구해질 때까지는 지금 직장에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기로 했다.

함께 도서관을 나서면서 힘없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R은 두 개의 납작해진 초코맛 시리얼바를 내게 내민다. 자기는 오늘 이미 네 개나 먹어서 물린다며 내 잠바 주머니에 기어코 쑤셔 넣고는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손을 흔들며 먼저 저만치 걸어간다. 그날 집에 오는 길에 먹은 초코 시리얼바는 유난히 달아서 씁쓸한 나머지 나는 연신 물을 들이켰다. 그래도 쓴 기운은 가시지 않았다.

어떡해야 하나. 무력감이 내성발톱처럼 속마음을 파고들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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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찌와 시간


지난 주에 쓰려던 글인데 생각에 발목이 잡혀 늦어졌다. 원래 모찌에 대한 글인데 시간에 대한 글이 될 것같다. 요즘 내 글은 마침표 찍을 때까지 어디로 흐를지 모른다.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다 보니 시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시간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시간의 흐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시간의 흐름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흐름에 대한 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결론이 예상된다.

모찌는 곧 이웃이 될. 선아&재형 부부의 강아지이다. 간난강아지 시절부터 만나와서 모찌의 삶에 내 지분도 상당하다. 내 시간이 흐를 때 모찌의 시간도 흐른다. 모찌의 시간은 간다. 그녀의 심장박동만큼 빠르게. 개들의 평균 심장박동수는 160bpm, 강아지 시절에는 200-220bpm이다가 성견이 되면, 대형견은 140bpm, 소형견은 180bpm, 참고로 인간의 심장박동이 70-100bpm. 그러니까 강아지의 일생은 갓 태어나서는 Metalica의 The Four Horsemen에 맞춰 심장이 뛰다가 서서히 Beyonce의 Irreplaceable에 맞춰 사는 건데. 인간이 거의 평생 Don’t Worry, Be Happy 에 맞춰 사는 것에 비하면 꽤 빠른 템포라 할 수 있다. 선아 누나네 강아지 모찌는 아침이 되면 잠이 덜 깬 사람들의 발가락을 핥아 다니며 격한 아침 인사를 건넨다. 강아지의 기대수명은 인간의 1/6, 즉, 인간의 하루는 얼추 강아지의 일주일. 모찌는 시간을 어떻게 볼까.

모찌 시간 걱정할게 아니라 요새 나는 시간을 어떻게 보고 있나 생각해보니, 부쩍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왜 나이가 들 수록 빨리 흐르는 듯 느껴질까. 첫 째, 시간은 절대적이지만 상대적이다. 한 해 한 해가 일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감소한다. 10살 일 때는 1년이 인생의 10%, 20살이되면 5% 30이 넘어가면 3% 대로 떨어진다. 어느덧, 1년은 삶 전체로 보면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다.  둘째,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을 덜 챙겨보고 덜 기다린다. 소풍, 놀이공원, 크리스마스, 터미네이터2 개봉, 디아블로 발매. 야자는 언제 끝나나, 고3은 언제 끝나나, 후름라이드 앞 줄은 왜 이렇게 긴가. 다음 주 만화점프는 언제 나오나 드래곤볼은 언제 완결되나. 지금은 이런 기다림이 없다. 기다림이 줄면 시간은 그다지 더디게 느껴지지 않는다. 셋 째, 이정표 삼아 시간을 가늠할 만한 큰 일들이 나이가 들수록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삶이 시큰둥해지는 만큼, 시큰거리는 일들도 시끌거리는 일들도 많지 않다. 입학, 학교 앞 뽑기, 달고나, 서태지 1집, 첫 자전거, 첫 급식, 교통사고, 청소년 노래방, 변성기, 졸업, 입학, 반항, 졸업, 입학, 독립, 졸업, 입대, 결혼. 이정표의 간극이 점점 멀어진다. 내 다음 이정표는 무엇이 될까.

이 정도로는 훌쩍 지나버린 시간에 대한 억울함이 풀리지가 않아 Google신께 왜 나이가 들 수록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답을 점지하니. 논문 몇 개 던져 주신다. 대부분 인지심리 및 행동심리 관련해서 Impact Factor가 0.5를 웃도는 낮은 티어 저널들이었는데. 맛들어진 글들을 보니 왠지 저자들이 즐겁게 조사했을 것 같아서 부러웠다. 학자들이 설문을 통해 밝혀낸 결과에 의하면 사실 나이는 큰 변인이 아니고, 결정적인 요소는 *Time Pressure 라는 개념인데. 시간에 의한 압박의 강도가 클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사람들이 대답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면서 봐온 각종 시험들; 중간고사, 기말고사, 수능, TOEIC, TOEFL, GRE. 한 두 시간 시험 중에 느낀 시간의 속도감은 일상의 한 두 시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도 시간의 압박 속에서 데드라인이 정해진 프로젝트나 보고서 마감, 납기가 있는 일들을 할 때, 하루는 또 일주일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생각해보면. 그래. 나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스트레스, 스트레스, 머리 속을 맴도는 끝마치지 못한 일들의 망령들이 시간을 좀 먹고 있었다!

일년 째 차에 걸려있는 아델 씨디를 들었다. 4번 트랙, When We Were Young. 절절한 목소리에. 겨울비까지 오는데. 4분 여 시간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돌아갈 수도 없는 시간에 발이 걸려 자꾸만 넘어진다. 점점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천천히 젊음으로 매번 돌아가게 해주는 묘약은 기억이다. 이정표들을 따라 되돌아간 기억 속에 나는 아직도 20대 초반 언저리에 머물러있었다.

선아&재형네 집에서 코스트코에서 사온 짜장에 전날 굽고 남은 목살들을 함께 볶고, 군만두와 함께 먹고 있으니 모찌가 노려본다. 일단 한 그릇 비우고, 모찌를 안아 소파로 간다. 야들야들한 배를 맡기는 모찌. 모찌에게 정신을 쏟는 그 몇 십 분이, 집 안으로 성큼 여문 정오의 햇살과 달달하게 흐른다. 모찌는 장수할거다. 모찌가 등을 내민다. 식탐도 없고 운동도 좋아하고 어딜 가도 사랑 받으니. 이제 생후 14개월. 하지만 몸은 이미 다 컸다. 지금 모습 그대로 15년을 함께 하겠지. 겉모습은 멈춘 듯 그대로, 그래도 모찌의 시간은 숨가쁘게 흐른다. 눈 깜빡 할 사이에 그녀의 하루는 간다. 우리가 커피 한 잔 하는 사이에 모찌의 반나절이 사라진다. 우리가 하루를 보내고 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녀의 일주일이 지나있다. 모찌가 긴 하품을 한다. 모찌는, 계산이 없는 모찌는, 사랑을 주고만 가기에도 부족한 삶이라는 것을 안다. 아침에 눈 뜨면 혀를 휘날리며 내게 달려온다. 한껏 앞 발을 뻗어도 겨우 내 정강이까지지만, 밤 사이 그녀의 그리움이 한 뼘 자라 있는 것을 본다. 고맙게도, 매일매일 숨가쁘게 달리는 사랑을 본다. 그 작은 앞 발로. 멈춰 있는 내 등을 떠민다.

그래. 시간의 흐름 따위, 개나 주라지.

*Janssen, S.M.J., M. Naka, and W.J. Friedman. 2013. Why does life appear to speed up as people get older? Time & Society 22(2): 274-290.